계절처럼 돌고돌아 다시 꽃피는 봄이 오면

 

 

사방이 고요하다. 말간 유리창 너머로 파도가 철썩인다.

하늘도 어둡다.

언제부터인가 비가 촉촉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예쁘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공기를 진동시킨다. 파도치는 모양새가 예쁘다는 건지, 아니면 비 내리는 풍경이 예쁘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유리창에 반투명하게 비친 제 눈동자가 예쁘다는 건지. 주어를 잃어버린 문장이 긴 여운을 남기며 아직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닌다.

 

눈을 감고, 큰 유리창 앞에 쪼그려 앉았다. 비가 내려서인지는 몰라도, 창문 틈새로는 꽤나 차가운 바람이 쎅쎅대며 들어온다. 그 냉기에도 아랑곳 않은 채 소년은 무릎에 얼굴을 폭 묻는다.

 

"빨리 와."

소년의 마른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소년은 비가 무섭다.

제 사람이 좋아하는 비가 예쁠 뿐이다.

 

--

투둑투둑하며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무겁다. 어깨에 바짝 메어져 지금은 제 등판을 콩콩 두드리는 제 가방도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운 것 같기도.

 

빗방울이 촘촘히 묻어 있는 그네에 앉아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고는 다리를 앞뒤로 번갈아가며 흔든다. 어느 샌가 우산은 놀이터 저편에 나동그라져있고, 짙은 고동색의 머리카락은 물기를 살짝 머금은 채로 젖어있다. 초가을이라 약간은 서늘한 비 냄새. 입고 있는 춘추복은 등과 어깨부분이 빗방울 모양으로 동그랗게 젖어있다.

 

"보고 싶다."

 

적당히 잘 빠진 입술 사이로, 달큰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삐져나온다. 울음을 참는 듯 예쁜 입술을 고른 이로 꾹 깨문다. 푹 숙인고개 덕에 머리카락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린다.

 

소년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렇게 울 폼새를 드러내 놓고서. 이내 싱긋- 하며 웃기까지 한다. 그리곤 천천히 그네에서 일어나 형편없이 나동그라진 검은색의 우산을 집어 든다.사람들은 비 맞을 거 다 맞고 우산이 뭣 하러 필요하겠냐며 다시 그 우산을 쓰는 소년을 보며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소년은, 꿋꿋이 그 우산을 다시 쓰고는 길을 걷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결국 소년은 감기에 걸렸다. 비를 맞고도 아무 생각 없이 축축한 교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다 집으로 들어가서 그랬을 것이다. 그 다른 이가 보았더라면 질책하며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모양새였다.

 

소년은 비를 좋아했다. 비가 좋다. 비 내린 후의 그 꿉꿉한 흙냄새와 서늘한 바람까지 하나하나 전부 좋아했다. 결국 그러다가 감기에 걸려버리곤 하지만.

 

소년은 감기에 걸려버렸음에도 꿋꿋이 학교에 갔다. 저 자신을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집에 소년의 감기기운만이 옅게 남아 있다가 이내 점점 사라진다.

 

결국 소년은 조퇴를 했다. 두 볼이 열에 달아올라 붉어졌고, 가물거리는 시야는 굳이 소년이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초점 없는 시선에 누구나 알 정도였다. 소년은 아팠고, 그래서 그 다른 이 말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 이에게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홀로, 이 빗소리를 들으며 떨고 있을 제 사람에게 가야했다. 소년은 감기에 걸려 있었고,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다.

 

기나긴 폭우는 사람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

소년은 무작정 그 이가 있는 곳을 목적지로 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간신히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곧 떠나는 버스를 잡을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곧 그 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곧아졌다.

 

버스는 두 시간 반을 달려 바닷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했다. 비는 아직 오고 있다. 조금 전 보다 조금 더 세차게 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소년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얼마 안 되어 소년은 한 주택 앞에 섰다. 높은 담이 거슬렸다. 그렇지만 소년은 그냥 담을 넘어보기로 했다. 미끄러지길 대여섯 번, 포기 할 만도 했지만 소년은 지금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볼이 화끈거리고 숨이 더워지는 게 단순한 감기는 아닌 듯 했다. 소년이 담을 넘었다.

 

--

담요를 발끝에 둔 채,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소년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점점 소리가 선명해졌다.

 

도경수! 도경수! 안에 있어?”

 

듣기 좋던 목소리가 다 갈라져있다. 소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문간으로 나간다. 꿈일까, 실제일까.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훅 끼쳐오는 바닷바람과 서늘한 비 냄새. 거기에 더해진, 익숙하고, 따듯한 향기. 소년은 제 앞의 소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적셔진 셔츠가 소년의 서늘한 볼에 닿고, 그 다른 소년의 열로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가슴께에 그대로 붙어온다. 푸슬푸슬, 울 듯 웃은 소년이 제 허리에 감긴 팔을 풀어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경수야.”

 

“...”

 

나 왔다.”

 

“...”

 

울지 말고.”

 

“.........”

 

나랑 도망칠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 얼굴이 눈물로 가득했다.

 

“,..., 감기, 걸렸..”

 

, 괜찮아. 좀 자면 될거야.”

 

소년이 웃으며 다른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불안한지 경수는 자꾸만 소년을 누이려 했다.

 

“...누워봐, 일단, 좀 자고, 약 먹자...”

 

지금 안 나가면, 우리 계속 여기 있어야 해.”

 

“...괜찮아. 죽어도, 너만, 있으면 돼.”

 

여전히 바보같애.”

 

상관없어. 멀쩡하게 내 눈앞에 있으면 돼.”

 

그래, , 좀 잘래...”

 

그래.”

 

일어나서, 나랑 놀자. 백현아. 이젠 어디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줘.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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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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